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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소년보호소 (大邱少年保護所)

대구소년보호소 1930 경상북도사회사업요람의 사진을 AI로 복원한 사진입니다.

AI 활용

◎ 대구소년보호소 大邱少年保護所

소재지 - 달성군 달서면 원대동(院垈洞,현 서구 원대동과 북구 노원동일대)

설립 - 1916년 8월

연혁 - 대구부내를 배회하는 부랑소년의 교화 보호를 목적으로 최초 대구경찰서 구내에 있던 시설물이 1927년 10월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조직 - 대구경찰서장의 감독하에 순사부장 1명이 전담하여 본 사업을 맡고(鞅掌)있다.

 

유지 - 부내 이장우(李章雨)씨의 기부기금 5천원의 이자와 기타 독지가의 기부금 및 작업수입으로 유지한다.

* 이장우(李章雨,1871∼1944) 일제시대 창씨한 이름은 이와무라 아키우[巖村章雨]이다.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 하서정(下西町)

대구지방의 대지주이자 지역 유지로 대한제국의 육군부위(陸軍副尉)를 지내다가 1907년부터 대구 지역의 경제계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대구은행, 1913년에는 대구지주조합 창립에도 참여하였으며, 이후 대구은행감사, 경일은행감사, 대구주조주식회사 이사, 대구상업회의소 상무위원 및 특별위원, 경상북도 농회부회장과 조선농회 통상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18년부터는 대구부 협의회원, 경상북도 도평의회원(道評議會員), 경상북도 미곡통제연합회 부회장 등을 맡았다. 1919년에는 대구자제단(大邱自制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대구소년보호소와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의 조선지방 본부에 많은 액수를 기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설립에 참였고, 사망 1년전인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에 임명 되었다.

포상-1928년 소화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 1933년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에 6천원을 기부한 공으로 포상, 1937년 대일본 무덕회 조선지방 본부 무덕전(武德殿) 건축비를 1만원 기부한 공으로 감수포장(紺綏褒章), 1938년에는 1927년 경상북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북여고)에 설립비로 4,816원을 기부하여 포상을 받는 등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사업 - 현재 수용소년 20명으로 수업사 1명을 고용하여 죽세공 및 짚세공을 가르치고 있다.

- 경상북도사회사업요람 慶尙北道社會事業要覽 / 경상북도내무부지방과 1930년 발행 제2장 아동보호 중

경북 김천소년형무소 교육장면

도시는 발전에 따라 어느 곳에서나 부랑소년 증가를 피할 수 없다. 대구도 이 문제로 고민한 결과 1926년 10월 대구경찰서장의 감독 아래 소년보호소(少年保護所)를 설립해 전담 순사 1명이 전적으로 해당 임무를 맡고 있다. 재원은 전부 독지가의 기부로 충당하고 있고 현재 12〜18세 소년 14명을 수용해 농경과 기타 수공업에 종사시키면서 오로지 근로 정신 함양을 기하고 있으며 더불어 수신(修身)과 일본어 등의 교과목도 가르쳐 출소 후에 공민(公民)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자격을 갖추도록 전념하고 있다. 현 대구경찰서장 오키 토쿠고로(沖彳恵五郞)는 이러한 종류의 사업에 흥미를 갖고 때때로 사제를 털어가며 열심히 담당자들을 독려하고 있어서 성과는 매우 양호하다.

1934년 대구안내 (대구부의 공공시설 중에서)

대구 신정유치원 대구소년보호소에 의류 10점 기증 1927-12-25 부산일보

대구소년보호소에 기부 1928-12-18 부산일보

대구염매소에서 연말할인판매를 한 이익금 일부 오십원을 대구경찰서 소년보호소에 기부했다는 내용

 

일제시대 대구 지역에서 배회하는 고아를 수용한 기관으로 소매치기, 구두 절도 등 치안을 불안하게 하는 고아들을 교화하고자 설립되었는데 이후 주거 불명인 고아도 수용하였습니다. 1916년 부터 8월부터 대구경찰서 구내에 설치되어 있다가 1927년 10월 대구부 원대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에 이전 설치되었습니다.

대구경찰서장의 감독 하에 설치된 대구소년보호소의 재원은 이장우(李章雨)씨 등 대구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으나 항상 경비와 시설이 부족하였습니다. 대구경찰서는 순사 숙소와 경비를 활용하여 해소하고자 하였지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대구소년보호소는 장소와 설비 부족으로 확충이 시급하여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신암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부지 약200평을 빌려 총 공사비 4,000원을 들여 신축하고 1932년 11월 19일 낙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낙성식에는 경상북도지사 이하 관민 유지 100여 명이 참석합니다.

대구소년보호소는 양송이를 재배하여 고아를 자립시키고자 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의 사회사업은 조선총독부 또는 천황의 하사금인 은사금으로 각 지방에 있는 사회단체에 지원금을 지급하면서 관리하였습니다. 1935년 2월 천황이 전국에 산재한 68개 사회단체에 지원금을 지급할 때 대구에서는 대구소년보호소, 대구 나병원(애락원), 대구상성회, 경북구제회, 천주교수녀원 부설 여자 고아원(백백합 보육원)이 지원금을 받았습니다.


조선의 소년보호소

​소년보호소가 처음 생긴 배경은 일본통치 초기 조선 사회가 근대화 되는 바뀌는 과정에서 소년 범죄가 큰 사회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때 조선은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가 통합이 이루어져 일본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고, 조선인들은 일본 국민으로서 근대적인 사회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도시화와 빈곤 때문에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소년이나 소매치기 같은 소년들이 늘어났고, 치안 유지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요인으로 여겨졌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소년들을 그냥 무관심하거나 방치하면 사회 전체 발전이 더디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가정 결함 같은 개인적 원인을 중시하며 교화 시설을 도입했습니다. 1907년 감옥관제 도입 후 성인과 소년이 섞여 수용되는 문제를 풀기 위한 조치였으며, 1923년 조선감화령이 공포되면서 불량아 보호가 법으로 명확해졌습니다. 그래서 소년보호소는 소년들을 제2국민으로 여기며 인적 자원을 키우는 근대화 정책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운영 방식은 교육과 작업 훈련을 중심으로 했고, 연령과 불량 정도에 따라 소년들을 따로 수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소년보호소는 주로 8세부터 14세 미만의 불량 정도가 낮은 소년들을 대상으로 보통학교 수준의 학과 교육, 예를 들어 수신, 일본어, 산술, 체조 등을 가르쳤고, 자립을 돕기 위한 기술 교육처럼 재봉이나 목공 같은 것도 실시했습니다. 1923년 소년수형자교육규정에 따라 실용적인 내용 중심으로 누진적인 계급 처우를 적용했는데, 품행과 작업 성적에 따라 배급품이나 운동 기회를 다르게 주었고, 소년들의 인격을 키우고 직업 기술을 익히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보호 처분은 조건에 따라 보호자에게 인도하거나 사원, 교회, 보호 단체에 맡기고, 소년보호사가 관찰하거나 감화원, 교정원으로 보내는 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최대 25세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소년보호사는 가정 환경과 범죄 동기를 조사해 처분을 정었고, 학교, 경찰, 가정 같은 지역 사회와 함께 불량 징후를 일찍 찾아냈습니다. 이런 방식은 일본 본토 소년법을 본뜨되 조선 상황에 맞게 고쳐 치안 유지와 황국신민 양성을 더 강조했습니다.

주요 사례로 위의 대구소년보호소가 있습니다. 다른 사례로는 영흥학원, 목포학원, 선감학원 같은 감화원이 1923년부터 조선총독부 직할로 운영되면서 불량아를 보호하고 키웠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사립 감화원처럼 명진사나 적기학원도 지역 사회 불량아를 맡아 관리했습니다. 교정원은 1942년에 새로 생겨 14세 이상 불량 정도가 높은 소년들을 집중적으로 교화했으며, 구세단의 후생학원 임시 건물에서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설들은 전국적으로 아직 부족했지만, 지방 단체의 도움으로 점차 확대 운영되었습니다.

전시 체제기에는 소년보호소의 역할이 국가 통합과 근대화의 전쟁 준비 과정으로 더 넓어졌습니다. 1942년 3월 23일에 공포된 조선소년령은 20세 미만을 소년으로 규정하고 사법 보호를 적용했으며, 경성에 설치된 소년심판소를 통해 보호 처분을 집행했습니다. 이 법령은 제2장에서 감화원 송치와 교정원 송치를 명시했고, 사건은 검사국이나 도지사로부터 처리되었습니다. 전시 노동력 부족으로 소년들을 산업 전사로 활용하기 위해 퇴원생을 제철 제강 공장이나 탄광으로 '취업' 형태로 보냈고, 1942년 소년보호운동을 통해 지역 사회 협력을 강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연성도장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후 공장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소년들을 국가 인적 자원으로 다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42년 소년심판소 접수 건수는 63건으로 시작해 1943년에는 562건으로 늘었는데, 주로 절도죄였고 전시 혼란 속 가정 불안을 보여줍니다.

소년보호소는 일본통치시대 조선의 근대화 발전 과정에서 소년 교육과 사회 적응을 통해 국가 통합에 기여했습니다. 설립 초기에는 치안 유지와 교화에 초점을 맞췄다가 전시기에는 인적 자원 양성으로 발전했고, 해방 후에는 소년원 등으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