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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구경마장 競馬場 1933

My Identity 2023. 7. 25. 23:22

대구경마장 競馬場과 한국경마역사

 

1934년 대구안내서의 경마장(競馬場) 소개

" 부의 근교 원대동에 사방으로 조망이 좋고 봄가을 산책하기에 좋은곳에 위치한다.

사단법인 경마구락부(俱樂部, CLUB)의 경영으로 클럽이 창립된것은 1924년, 시바가키 이치로(柴垣一郞)씨 외 십여 명의 애마가가, 일일본 각처의 공인경사장을 시찰한 이후, 애마관념의 보급과 마필 개량을 목적으로 동지 십여 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클럽을 창립하였다. 다음해인 1925년 봄 시노노메쵸(동인동)의 기타사토연구소(북리연구소)의 부지를 빌려서 제1회 경마회를 개최한 것이 대구에 있어서의 경마의 최초 경마대회다.

1926년 5월 총독부 처리 정식 인가를 받아 시바가키(柴垣), 아오키(靑木), 시마다(島田) 씨 등이 차례로 회장을 맡아 클럽 발전에 힘

썼다. 이후 총독부의 방침에 준거하여 1933년 9월 부의 근교 원대동에 2만1천여평의 부지를 구하고, 길이 1600미터의 마장을 설치하였다. 관람석, 투표장 등의 설비는 일본의 선진 도시와 비교해도 손색없어서, 마사사상의 보급과 마필개량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조선 굴지의 공인 경마장으로서 매년 춘추 2계절 마다 경기가 치뤄진다."

대구안내 1934

1938년 경마장 위치 당시는 원대동이다.

197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노원동이 신설되고 현재는 노원동2가에 위치한다. 2021년 대한마사회 김정희 학예사의 조사 결과 확실한 위치가 밝혀졌다.

대구시 각 구별 지명유래 조사자료에도 의하면

북구 노원동(魯院洞) 2가의 자연부락 - 경마장

경마장은 노원동 1,2가에 있었던 경마장인데, 노원 1.2가를 통칭하는 자연부락으로 불러왔다. 노원 1.2.가는 원래 넓은 들판이었다. 그 들판에 경마장이 생겨 말을 타고 경주하는 경기장이 되었다. 현재는 주로 노원 2가가 경마장의 중심 지역이다. 그러다가 경마장 주위에 마을이 생기자 이 경마장이 자연부락으로도 불리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경마장은 사라지고 주위에 마을만 들어서게 되어 이 주변의 마을을 최근까지 경마장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오래 동안 자연부락으로도 일컬어 왔다.

(제보자 :북구 고성동 1가 107-28번지, 최영선, 73세, 남, 채록일자 2008.11.25. / 북구 고성동 1가 107-28번지, 최영선, 73세, 남, 채록일자 2008.11.25.) 으로 되어 있어 현재 노원동2가 지역이 확실한듯 하다.

대구역 광장의 말탄 사람들

사람들이 군복을 입지 않은 민간인들이다. 아무래도 경마대회 참가를 위한 선수들이나 대구부내의 경마클럽 회원들인듯 하다.

1936년 관광지도에서 기입된 대구경마장, 원대동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국내 경마는 일본인 마주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초창기 경마 기수들 역시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조선경마대회는 조선경마구락부의 모체인 경성승마구락부에서 개최한 최초의 공식경마대회로 기수는 대부분 일본의 지방경마장에서 초청한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기수는 1921년 9월 23~25일 여의도경마에 출전한 김자근봉(金者斤奉, 한국이름이 김작은봉, 김소봉으로 추정 되는데 나중에 김승배로 개명)과 이복남이 있었다. 김자근봉 기수는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카야마 경마구락부에서 정식 기수 면허를 취득해 활동했는데, 1938년 5월15일 한신경기장에서 열린 제2회 천황상( 帝室御賞典) 대상경주에서 하세파크(ハセパーク)라는 경주마를 타고 우승하여 조선인의 기개를 드높였다. 하세파크는 생애통산 37전 8승의 평범한 성적임에도 천황배 경주를 제패한 경주마로 일본 경마사에 이름을 남겼다.

일제시대 초장기 경마기수들

1920년대에는 서울의 조선경마구락부를 본받아 전국에서 경마구락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20여개를 헤아렸다. 하지만 법인설립의 인가를 받은 경마구락부는 전국 6도시에 6개 구락부뿐이었다. 인가받은 구락부는 서울의 조선경마구락부(1922년), 평양의 평남(平南)레이스구락부(1924년), 대구의 대구경마구락부(1927년), 부산의 부산경마구락부(1928년), 신의주의 국경경마구락부(1928), 군산의 군산경마구락부(1928)다. 대구경마클럽은 허가는 1926년에 얻었지만 경마개최는 1929년부터 시작 되었다.

부산경마장 1930년

일제시대의 조선에서도 경마가 행해진것을 두고, 대한민국의 일부 몰지각한 역사가들은 우민정책의 일환으로 행해졌다는식으로 폄훼 호도하고 있는데, 일본 본토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경마도 마필개량과 경마진흥 보급이 목적이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그렇지, 일제시대 조선의 경마 개최가 우민정책이라면 해방후부터 적극적으로 개최된 대한민국의 경마도 역시 마찬가지로 우민정책이고, 대한마사회도 그 우민화정책의 도구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런 주장 자체가 대한민국 국민을 어리석은 우민으로 깔보고 하는 주장이다.

최계복 가을의 경마 대구 경마장 1937년 대구가을경마전 사진공모특선

대구의 경마는 처음에 달성공원터에서 진행되다가 원대동에 경마장을 최대규모로 크게 신설하여 경기가 펼쳐졌다

초기 조선 경마 관람객매출 추이

연도 방문자 수 마권매출액 개최지

1925년 37,575명 170,208엔 경성, 평양

1926년 51,109명 256,734엔 경성, 평양

1927년 65,657명 635,326엔 경성, 평양, 부산

1928년 224,793명 1,283,988엔 경성, 평양, 부산, 신의주, 군산

1929년 241,160명 1,878,860엔 경성, 평양, 부산, 신의주, 군산, 대구

1930년 214,331명 1,658,799엔 경성, 평양, 부산, 신의주, 군산, 대구

* 1930년 입장객 수와 매출이 전년보다 줄어든 것은 1930년에 비가 많이 왔기 때문이다.

대구경마장신설 공사착수釜山日報社, 1930

1930년 각 경마 클럽의 판매

경마 클럽 마권 발매매수 마권매출액

경성클럽 372,557매 745,114엔

평남클럽 86,952매 173,904엔

대구클럽 111,547매 223,096엔

부산클럽 186,280매 372,560엔

신의주클럽 14,757매 44,271엔

군산클럽 49,677매 99,354엔

총 821,770매 1,658,299엔

* 1930년의 기후의 영향을 제외하면 조선 경마가 계속 발전하고 경성의매출이 전체의 절반정도 차지하고있는 것을 알 수있다.

4만평 규모의 대구 신축경마장 완공. 철근콘크리트 계단식 4천명 수용 관람석에 경마장 트랙길이가 1500미터

매년 각 경마장의 출주 두수

클럽 / 연도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조선경마클럽 172 마리 114 마리 312 마리 312 마리 232 마리

평남레이스클럽 118 마리 300 마리 194 마리 321 마리 216 마리

대구경마클럽 203 마리 356 마리

부산경마클럽 99 마리 176 마리 176 마리 299 마리

국경경마클럽 95 마리 200 마리 206 마리

군산경마클럽 87 마리 147 마리 161 마리

*대구의 경마 말 두수가 가장 많다.

대구경마장준공식 매일신보1933-10-29

대구경마장 지진제 地鎭祭 부산일보1933, 경기장 신설후 고사지냄. 지진도 안나는 동네에서 일본식 지진제를 지낸다

1928년에는 경성의 신설동 경마장이 개수되어 본격적인 경마장되어있다. 이 신설동 경마장은 조선 경마의 중심이되어 1945년에 일본인이 떠난 후에도 시설은 한국 전쟁까지도 경마가 진행 되었다 .

신설동경마장 외빈방문

조선 경마령의 공포

조선 경마는 일단 일본본토의 규정에 따라 개최되어 있었지만, 경찰 등의 재량에 의해 허용되는 법률상의 근거없이 개최되고 있었다. 따라서 통제가 이루어 않고 마정(馬政)의 관점에서도 조선 경마 법규제정의 필요성이 지적되어 1932년에 조선 경마령이 발포되었다.

경성 신설동경마장 1931년

조선 경마령 공포 후 공인 경마장 이외로 마권을 판매 경마 개최 할 수 없게 되었고 기존의 경성, 평양, 부산, 신의주, 군산, 대구의 각 경마 단체를 총괄 · 조정하는 상위 조직으로 사단 법인 조선 경마 협회가 설립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 말 정부 계획이 실시되고, 이에 따라 함흥, 청진, 웅기의 3 곳의 경마장이 공인 된 조선의 경마장은 1941년 조선총독부 공인경마장은 경성, 부산, 군산, 대구, 평양, 함흥, 신의주, 청진, 웅기의 9곳이 된다 .

조선 경마령 공포 후 조선 경마는 순조롭게 발전하여 1940년에는 봄시즌의 매출이 1930년 1년간의 5배에 가까운매출을 올리게되고있다. 그러나 1941년 말에 시작된 태평양 전쟁 조선의 경마는 경주마를 군마로 공출 당하고 소규모 경마장순으로 폐쇄되고 경마장은 군부대가 된다. 1945년 봄에는 조선의 경마장은 경성, 평양, 대구, 부산의 4 군데만 남는다. 그러나 해방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떠나자 경마경기는 중단되게 된다.

해방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마사회는 1949년에 한국마사회 로 명칭을 변경하고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서 경마가 개최되고, 김구 , 이승만 등의 요인도 경마를 즐겼다 고한다. 해방 당시 서울 신설동 경마장에는 20여명의 한국인 기수가 있었는데, 서울 출신 최일선과 정주섭, 북조경마장 출신 김정식과 김완기, 일본경마장 출신 김자근봉(김승배)과 정태생, 만주경마장 출신 최인철 한승길 권인덕 박원봉 등이 활동했다.

그러나 막 시작된 한국의 경마도 한국 전쟁 에 의해 중단을 피할 수 없게된다. 한국 전쟁 휴전 후 서울에서 새롭게 뚝섬 경마장을 신설. 치열했던 전란으로 경주마는 잃어버린 제주도 특산 조랑말 제주도 말에 의해 경마는 부활한다. 그 후, 1989년 에 뚝섬 경마장을 폐쇄하고 과천 서울 경마장 열린 제주도에 경마장이 설치되고, 2005년 부산 김해에도 경마장이 설치되고, 2014년 현재 한국의 경마장은 서울.부산.제주 3곳이된다.

* 2021년 10월28일자 '달성공원에서 경마를?' 한국경마 100년의 흔적, 대구경마장을 찾아... 보도기사

기사는 과천 말박물관 김정희 학예사의 군산경마장에 이어 두번째로 대구경마장 탐사 취재로 이뤄진 보도기사 이다.

이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한 것 같아 약간의 자부심도 느껴본다.

http://www.dailysportshankoo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8294

원문 : https://blog.naver.com/quixcha/22236249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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