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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 조선에 귀화

조선초기 조선왕조실록에는 태국인, 인도네시아 사람,. 이슬람교도, 중국인, 일본인, 만주지역에 흩어져 사는 야인(野人.여진족)등 외국인이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해 살아가는 모습이 자세히 소개 되어있다. 특히 여진족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북청무해대에는 삼국시대부터 귀화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중종실록 중종30년(1535) 10월9일

압록강과 두만강 밖에 거주하던 여진 종족은 좋은 말이 새끼를 낳으면 조선에 바쳤고, 흉년이 들어 농사를 망치면 조선에 곡식을 빌리러 와...

시간이 흐르면서 여진족들은 조선에 귀화하여 정착생활을 하였다.

조선 초기 동북쪽 국경 지역에서 조선과 여진 부족간 충돌이 잦았는데 조선 조정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여진족 추장 가족 중 신체가 건강하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들을 서울에 보내도록 협약을 체결한다

조정에서는 여진족 추장의 자제가 한양에 오면, 임금의 곁에서 호위하고 왕실 수비를 담당하는 '시위대'에 배치헸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 임무를 맡긴 것이다.

여진족의 입장에서 조선에서의 시위 생활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문명국 조선에 보내 선진 문물을 습득케하는 유학의 기회였다.

조선 입장에서는 말썽 많은 여진족들과 무력충돌을 방지하고 유사시 볼모로 삼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조선에 시위직을 하러 오는 여진족들은 활을 잘 쏘고, 무예가 뛰어나며, 말을 잘 타는 용맹한 전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왕실경호대장에 오른 여진족 장군 동청례

조선 정부가 시위직을 하려는 야인에게 벼슬과 양식을 제공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진족들은 너도나도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요즘에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의 '한국행' 붐과 사정이 비슷했다.

조선에 뿌리를 내린 여진족 중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의 고위 관직에 오른 사도 있다.

조선의 외국인 중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은 함경도 회령 출신의 동청례(童淸禮) 장군이다.

조선에서 시위 살던 여진족 동소로가무의 아들로서, 조선에 귀화하여 성종 시절 무과에 급제, 연산군 시절 왕실 경호대장에 올랐다.

중종반정에 참여했으나 차별대우를 받자 불만을 토로하다 역모죄로 능지처참 당했다.

누르하치 시대

조선에서 하대 당하던 여진족이 제 세상을 만난 것은 지도자 누르하치를 만나면서부터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建州女眞) 추장으로 압록강 이북 지역에 살았다.

그는 중요한 국제 교역품이었던 모피와 조선 인삼 독점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재력을 축적 하였다.

그는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여진의 각 부족들을 정복하여 만주족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또한 만주문자를 창제하고, 법률제정등을 추진하였다.

광해군 8년(1616년)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후금(後金)을 건국 하였다.

12세기 만주에서 세력을 날리던 금(金)나라의 후예임을 선언한 것이다.

만주 파병 조선군 후금군에 조직적 투항

누르하치는 1618년 군사 2만으로 푸순(撫順)을 공격하여 점령 하였다.

후금이 만주에서 명나라의 패권에 도전하자 명 황제 만력제는 양호(揚鎬)를 요동 경략으로 임명하여 후금 토벌을 지시한다.

명으 압력으로 만주에 파병되었던 강홍립 군대는 후금군에 조직적으로 투항했다.

이것은 광해군과 후금이 사전에 미리 약속을 한 것이다.

1621년 선양(瀋陽)과 랴오량(遼陽)을 함락 시켜, 1625년 선양으로 천도 하였고,

1626년 2월 누르하치는 산해관 침공 도중 부상을 입어 사망한다.

그의 사후 누르하치의 8남 홍타이지가 칸에 올라 1636년 청(淸) 제국을 선포한다.

인조반정의 비극

떠오르는 태양 청과, 지는 해 명나라 사이에서 광해군은 놀라운 실용외교로 명.청 교체기에 국제분쟁에 휘말리는것을 피했다.

1623년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 정권을 출범 시킨다.

인조의 쿠데타 집권세력의 명분은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선조의 정실 부인 소생)을 죽였다. '(폐모살제)'와 중화의 나라 명에 사대하지 않고 '명나라로부터 입은 은혜(재조지은)를 저버렸다'라는 명분으로 반정을 도모하여 광해군을 폐출하였다.

광해군은 신흥세력 후금과의 줄타기 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하는 등 현실론적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그를 내쫓고 망해가는 명을 섬겨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집단의 집권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야기한다.

피할 수 있었던 전쟁 정묘호란, 병자호란

인조가 왕위에 오른지 1년도 못되어 이괄의 난이 발생한다

반란의 선봉에 섰던 부대는 누르하치의 준동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했던 1만여 명이 서북변경 방어군이었다.

이 부대가 이괄의 난으로 도륙 당하면서 침략을 자초 하였다.

이괄의 난 3년 후 1627년 후금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정묘호란)

최명길 등이 나서서 후금을 형님으로 모시는 강화회담으로 휴전을 성사 시킨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양국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오매불망 명에 사대하는 집권층은 이 제의를 거부한다.

이에 청태종은 1636년 12월,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병자호란)

강화도로 가는 길 차단

12월 1일 청 태종은 12만 대군 이끌고 압록강 도강한다.

파발마가 청나라의 침략 사실을 서울 조정에 보고한 것은 12월 13일

청나라의 만주팔기 기마부대는 안주까지 진격, 12월14일 청군은 송도(개성)을 점령한다.

강화도로 가능 길을 청군의 선발대가 차단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임금이 수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므로 군신 중에는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고, 성안의 백성은 부자, 형제, 부부가 서로 흩어져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 인조실롤(인조 14년 12월 14일)

오랑캐에 항복

남한산성 농성 40일을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드디어 항복

조선 개국 이래 오랑캐, 야만민이라고 업신여기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치욕스러운 항복을 결정한다.

항복 소식이 알려지자 이조참판 정온, 예조판서 김상헌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다.

정온은 차고 있던 칼을 빼서 자기 배를 찔렀는데, 너무 살살 찔렀는지 목숨을 건졌고 예조판서 김상헌도 여러날 곡기를 끊고 있다가 목을 맸든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손들에게 구출 되었다.

인조 15년(1637년) 1월30일 조선 국왕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의 항복 의식을 거행 하였다.

병자호란은 외교파탄의 비극

항복한 인조는 수많은 인질을 청나라 군영에 볼모로 남겨두고 창경궁으로 환궁 하였다. 이때 사로잡힌 포로 1만여명은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며 울부짖었다.

청나라는 철수 과정에서 주전론을 주장했던 신하들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실록은 "온 나라 백성들 중 태반이 연루 되었다"고 표현 하였고, 야사(野史)에는 20만~50만명이 끌려갔다고 기록 되었다.

광해군은 실리외교로 파국을 면했지만, 인조반정 세력은 초지일관 친명배금(親명明背金)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명은 저물어가는 황혼의 나라, 청은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줄을 잘못 선 댓가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침략을 자초했다.

숭명배청(崇明排淸) 이데올르기 조작

조선 지배층은 오랑캐 두목에게 항복한 사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어젠다가 필요했다. 오랑캐에게 두 차례나 패한 조선의 지도층은 항복을 합리화 할 수 있는 변명을 모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이라는 존재를 등장시켰다.

조선은 수직적인 지배구조로 구성된 사회였고, 지배구조의 상징이 충(忠)과 효(孝)였다. 명은 부모의 나라이니 충의 대상인 동시에 효의 대상으로 내세웟다. 반면 오랑캐의 후예인 청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머리 숙인 현실을 부정하고 정신적 위안을 찾기 위해 이미 망해 사라진 명을 흠모하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이데올르기를 조작한다.

明은 떠받들고 淸은 무시하고

명을 칭할 때는 중국, 혹은 중조(中朝).황조(皇朝).황명(皇明)으로 표현 하였든데, 청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병자호란 당시 군부(君父)인 명을 공격한 원수 앞에 나가 이마를 땅에 찧는 항복을 한것은 조선의 지배층이 명에 대한 충효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은 셈이었다.

이 행위를 청군의 무력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상황논리로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그런 논리를 인정하는 순간, 소작농이나 노비들도 똑같은 논리를 내세워 양반지주나 주인에게 복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렇게 되면 성리학적 지배구조의 바탕 위에 서 있는 조선왕조는 붕괴한다.

오랑캐 중원을 차지하다

삼전도에서 조선이 청에 항복한 지 7년 후인 1644년,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패권을 차지한다.

명과 조선의 조공-책봉 관계는 파국을 맞았고, 공식적으로 청이 조선의 책봉국으로 등장한것이다.

조선의 지배층은 이때부터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내부적으로는 청을 부모의 원수로 부각시킨다.

인조는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 명 부활 세역, 삼번의 난을 일으킨 오삼계 세력, 준가르 등에 사신을 보내 청나라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시도는 청나라에게 발각되어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현실 불가능했던 북벌론

청나라에서 8년여 포로로 생활한 효종이 천명한 북벌론

당시 청은 인구 3억명, 국부는 조선의 수천배 규모에 이르렀다.

3대 황제 순치제부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150년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건륭제 시절 중앙정부 금고에는 8,000만량(약3,000톤)의 은을 축적 하고 있었는데, 이런 초강대국을 정벌 하겠다고 덤빈 나라가 조선이다.

효종은 중앙군 병력을 증강하고, 표류해 온 네델란드인들에게 조총개량 대포제작을 의뢰하였다.

북벌을 위해 강화한 군사력은 청나라로 쳐들어가기 위한 전투부대가 아니라 왕실호위부대 정도에 불과했다. 이정도의 군사력으로 북벌은 불가능 했다.

북벌은 정치적 선동무기

청나라 강희제는 각종 반란을 진압하고 청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를 정착시킨다.

이렇게 되자 '문명의 공적(共敵)'이자 '더러운 원수의 나라' 청에 대한 복수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과제였다.

북벌론은 현실성이 결여된, 환상적인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

효종이 북벌론을 제기한 이유는 정치적 명분 쌓기 용도였을 뿐이다.

북벌론은 삼전도 항복으로 동요하는 국내 여론과 분위기를 조선왕조라는 깃발 아래 묶는 강력한 선동무기였다.

북벌론은 청 정벌의 목적이 아니라 병자호란 패배의 책임 및 정치경제적 위기를 피해서 자신들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던것이다.

소중화라는 판타지 세계로 도피

1680년대 이후 북벌 담론이 파괴력을 잃자 조선 지도부는 청나라를 '천자(天子)의 나라' 명을 멸망시킨 강도, 문명의 공적(共敵), 더러운 원수의 나라로 포지셔닝 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겪은 조선 지배층은 이미 멸망하여 사라진 명에 의리를 지킨다는 배청복명(背淸復明), 존명사대등 비이성적 비현실적 판타지 세계로 도피한다.

조선의 국력으로는 청에 대적 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스스로를 '소중화'로 자리매김 한다.

“중원조차 오랑캐 만주족에게 더렵혀진 현실에서 중화 문물을 간직한 나라는 조선밖에 없다. 중화문명의 적통이자 계승자는 만주족 오랑캐가 세운 청이 아니라 조선이다. 따라서 이 세상 유일의 문명국이요 중화국은 조선이다.

조선은 ‘소중화’의 나라다.” 이것이 바로 조선 지도층의 현실 인식을 마비시킨 소중화 사상의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것은 의병, 이순신 수군

조선의 존명의리 가치를 현실화한 괴물이 대보단이다.

1703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만력제(萬曆帝)라 불리던 명나라 신존(神宗)황제를 제사 지내기 위해 만동묘(萬東廟) 사당을 건립한다.

만력제는 임진왜란때 명군을 조선에 보내 위기에서 구해준 '재조진은(再造之恩)'의 황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것은 명군의 활약보다는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게릴라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덕분 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와 지배층은 의병장 등 전공을 세운 세력들을 포상할 경우 이들이 정국을 주도하여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결과 일부 의병장들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제거하고, 모든 공을 명나라로 돌리는 정치적 꼼수를 쓴다.

송시열의 선동

명군을 파병하여 조선을 구해준 신종 황제의 은공을 갚기 위해 사당을 지어야 한다고 선동한 인물은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이다.

송시열을 장희빈의 아들 왕자 윤(후에 경종)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죽기 전 화양동서원에 신종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숭정제)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달라고 유언을 하고 죽었다.

이런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제자들이 건립한 사당이 만동묘이다.

이 움직임을 포착한 숙종은 그토록 중요한 이슈를 지방 선비 집단이 선점할 경우 국왕의 권위가 위축 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

이렇게 대보단은 1705년 숙종 때 처음 세워졌다.

망해없어진 명나라 황제 유령에게 제사

숙종은 1704년, 명나라 패망 60주년을 기리기 위해 국가와 왕실차원에서 창덕궁 후원에 명나라 신종에게 제사를 올리는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한다. ('큰 보은을 위해 쌓은 제단' 이라는 뜻이다)

명은 비록 망했지만 끝까지 사대의리를 지키는 조선은 성리학과 중화를 추구한 조선이라는 자위적 정서가 대보단 건립으로 표출 된 것이다.

대보단 제사는 영조시절 명나라를 건국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하사한 홍무제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함께 모시는 제단으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조선의 궁왕들은 매년 적어도 네 차례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대보단에 나가 이미 망해 없어진 명나라 삼황제 기일에 맞춰 거국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명의 삼황제는 자기 나라가 망한 후에도 200여년 이상 조선으로 부터 융숭한 제사를 받은것이다.

정조가 개혁군주?

대보단 강화에 심혈을 기울인 국왕은 '계몽군주'로 유명세를 탄 정조다. 이때는 이미 명나라 멸망 후 130년이 지난 시기였다.

쇠락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청의 질서가 너무나 튼튼하여 국내에서는 청이 이미 중화문명을 이루었다는 인식이 나타나는 상화이었다.

청으로 부터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이 대두 되었고, 서학으로 불린 천주교가 퍼져 조선을 지탱해오던 제사 제도가 위협을 받던 시기였다.

정조는 여전히 명나라 삼황제의 기일에 빠짐없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행을 하였는데, 현실적으로는 청의 질서 하에 살지만, 정신적으로는 명의 질서 하에서 산다고 착각을 한것이다.

개혁군주가 아니라, 주자학적 유교질서의 강화를 추진한 시대착오적 군주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주년이 되던 해 제례 후 정조는 이렇게 전교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이 다시 지음을 받은 날이다.아! (명나라) 황제의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정조의 친행(제례에 직접 행차) 비율은 24년 재위기간 중 23년(96%)으로 역대 최고였다.

정조는 서울의 유생과 무인에게도 제례 참석을 의무화해 불참자는 한시적으로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벌을 주었다.

나라가 기울던 고종에 와서도 제례는 계속됐다.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가 이어지던 1882~86년 고종의 대보단 친행은 더 잦았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기 한 달여 전까지도 홍무제 기일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 제례는 갑오개혁(1894~1895)에 와서야 중단됐다.

중일은 근대화 조선은 소중화로 돌격

중국대륙에서 명.청이 교체 되면서 주자학의 대안으로 양명학 고증학이 대두 되었다.

중국은 도시경제와 장거리 상업 발전, '자본주의의 맹아'라 불리는 부농경영이나 공장제 수공업을 전개하였고, 출판업의 융성에 따른 정보량의 급격한 확대 현상이 폭발적으론 늘어났다.

일본에서도 주자학의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 탈피하여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양명학, 고증학으로 눈을 돌렸고 네델란드에서 유입된 서양 학문인 '난가쿠'를 크게 발전 시켰다.

이 시기에 유럽에 칠기와 도자기, 17세기 이후에는 은을 수출하여 국부창출을 하여 근대화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조선 양반 지도층은 변화를 거부하고 소중화의 인식체계로 함목, 주자학만이 정통이라면서 다른 의견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도륙하였다.

200여 년 깊은 밤에 도둑 제사

청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은 공식 접촉을 제외하고 오랑캐 관리들과의 대화를 기피하였다.

청나라 시절 중국 관료사회의 공식 언어는 만주어로서, 황제에게 보고되는 문서는 만주어로 번역 되었는데, 조선에서 오랑캐 언어인 만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청나라의 정치.경제.사회.국제관계에 대한 고급 정보 수집이 불가능했다. (오랑캐의 말을 배우는것은 치욕으로 여김)

궁중 깊은 후원에 세워진 대보단에서 국왕이 주재하고 백관이 참례한 가운데 청국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깊은 밤중에 몰래 제사를 거행 하였다. 이러한 도둑 제사는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이어졌다.

대보단 제례는 1894년 6월 일본군이 서울을 무단 점령한 상태에서 추진된 갑오개혁에 의해 폐지되기까지 190년 동안 조선왕정 정치무대를 좌우 한것이다.

기형 변태 시대착오

극가를 유지하는 권위의 원천은 무력가 이념(사상.학문.제도)에서 나온다. 중화제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 온 조선은 모든 권위의 원천은 '한족 황제'에서 나왔다.

명이 망한지 250년이 지난 후에도 조선 국왕과 정치 엘리트들은 명이라는 '중화세계'와 절연하지 못했다.

현실세계에서 유령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는 오랑캐에서 더럽혀진 국제현실에 굴하지 않고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한 채 꿋꿋히 살아가고 있노라"고 자위 한것이다.

이것이 명청 교체기에 삼전도 항복의 아수라장을 겪으면서도 왕조가 교체되지 않고 통치질서를 성공적으로 유지 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대보단처럼 외국 황제를 국내 정치적 이유로 국가차원에서 제례로 규범화 한 사례는 인류 문명사애세 찾기 힘든 기형 변태적 현상 이었다.

오랑캐에 항복한 치욕감 씻기위해 중화세계로 후진

중화의 상징인 명나라를 흠모하는 주자학의 화이론적 세계관과 문명관이 배타적으로 내재화한 250여 년 동안 조선을 청을 통해 흘러오는 서양 선진문물을 거부하는 시대착오를 반복했다.

그들은 청나라가 새롭게 구축한 국제질서에의 동참을 완강히 거부했다.

조선은 만주족이 청을 세움으로써 중화사상과 절연하고 새로운 자아의식을 출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음에도 그들은 새로운 자아의식은커녕 죽어서 유령이 된 명나라 황제를 불러내 국가 차원에서 제사 지내고, 소중화, 존명의리 이데올르기라는 최악의 정신세계에 함몰 되었다.

근대화 시대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명을 중심으로 한 과거 질서와 중화문명에 의탁함으로써 정치이념과 사상철학이 철저하게 붕괴되어 조선은 멸망의 길로 향한것이다.

1637년에 정지된 조선의 역사시계

조선의 역사시계는 1637년 삼전도의 항복, 명이 멸망한 1644년에서 정지 되었다.

동시대에 쉬지않고 문명의 시계를 돌려 국부를 쌓고 국력을 축적한 주변국에 크게 뒤쳐지게 되었다.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의 경제력 격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벌어졌는데, 18~19세기 일본은 세계 7~8위의 경제력을 확보한 대국이 되었다.

조선이 19세기 말 일본보다 단지 30여 년 개항 시기가 뒤져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보는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크게 다른 착각에 불과하다.

한국의 친중반일 파시즘적 전체주의 그 근원은?

세월이 흐르면서 '청' 이라는 적대적인 타자는 일본으로, 서양으로 대체 되었다. 적대적 타자에 대한 저항과 거부, 반감은 한국인들의 강력한 자주의식과 민족 정서, 주체사상과 결합 되었다.

여차하면 반일감정, 반미감정에 휘말려 손에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뛰어나가 집단광기를 일으키는 정서적 멘탈리티를 구성한다.

만주족 오랑캐에게 항복한 후 그 복수를 위해 말 뿐인 북벌을 외치고, 망해 사라진 명황제의 유령에 제사지내는 파시즘적 전체주의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현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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