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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당시 만35세
순종은 1909년 1월 7일부터 6박 7일 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을 순행 한 이후, 19일에 서북부의 끝인 신의주까지 순행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9년 1월 27일 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 동안 평양 → 의주 → 신의주 → 평양 → 개성 등지를 순행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촬영한‘순종 황제 서북순행 기념사진’. 가운데에 순종이 앉아 있고 왼쪽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보인다. 앞줄 왼쪽 끝부터 고희경(추정), 권중현(추정), 박제순, 송병준, 고영희, 임선준,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 순종, 이재각, 민병석, 이재곤,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의성.
이 순행에는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궁내부 201명 · 내각 49명 ·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중 한국인이 198명, 일본인이 81명이었다. 서북 순행의 모든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사 3명과 무라카미(村上) 사진점 점원 2명이 궁정열차에 탑승했는데 현재 전하는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의 사진은 이때 찍은 것들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1909년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기념촬영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한 순종의 전국 순행은‘황제권을 존중한다’는 유화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7월 이완용은 비서인 이인직을 시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에게 병합을 제의했다. 고마쓰는“그물을 치기도 전에 물고기가 먼저 뛰어들었다”고 회상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나라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씨 왕조의 종묘와 사직은 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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