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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은 개항의 시기가 300년 정도 차이가 난다.
1543년 일본열도 최남단 가고시마 남쪽 다네가시마에 중국해적 왕지와 포르투갈인 페르낭 멘데스 핀투가 탄 배가 표류
섬의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다카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두정의 화승총 구입 한후 도검제작자에게 화기 복제를 명령한다.
이것이 일본 철포역사의 시작이다.
이후 매년 4월과 10월 포르투갈 무역선 쿠루시오 해류를 타고 일본 방문 비싼값에 화승총이 팔린다는 사실이 소문난다
핀투와 함께 다네가시마에 표류해 온 중국해적 왕지는 일본 고토를 근거로 중국과 일본의 무역을 개시한다
이후 고토에 수백척의 배가 드나들며 중국물자와 일본은 교역을 시작 - 개항의 시작
오다 노부나가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오다 노부나가
1548년 막부가 스페인과 무역을 시작한다
1549년 7월 스페인 신부 프란체스코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 가고시마 영주, 포르투갈과 우역을 위해 가톨릭 선교를 허용한다
규슈에 나타난 서양인은 남만인으로 불리웠고 타고 온 배는 남만선이라 불렀다
남만인들은 일본에 천주교와 화승총, 세계지도 지구의 포도주 카스테라 별사탕등 다양한 문물을 전파한다.
일본 지도자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전국의 다이묘들은 일본에 온 서양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고,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문명을 좋아해 포르투갈인 복장을 즐겨 입었고 포도주를 자주 마셨다.
1570년 무렵 나가사키 개항
나가사키가 본격적으로 개항을 한것은 1570년 무렵이다
1570년경 일본 최초의 가톨릭 신자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 영내에서 나가사키항을 외국인들에게 개항을 히였다.
이때부터 예수회, 프란치스코 수도회 선교사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일본 규슈 일대에 기리시탄(천주교인)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582년 2월 20일 규슈 지역 기독교 영주들이 13~14세 소년 4명을 로마에 파견(덴쇼 견구 소년 사절단)
2년후 로마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 중 3명이 신부 서품을 받고 귀국했다.
이들 사절단 외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유럽에 다녀오게 된다.
네델란드 상선
동아시아에 나타난 네델란드
1571년 네델란드가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였고, 1588년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하였다.
1595년 네델란드가 인도항로에 진출아혀 향료무역을 개시하였다.
네델란드 정부는 1602년 세계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델란드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하고 동양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회사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식민지를 건설. 1619년 바타비아(자카르다)에 동방 무역 거점 건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일본과 교역하면서 포루투갈 스페인을 앞서가기 시작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쓰
일본과 서양 교역개시
1600년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무역선 리프더호가 규슈에 표류하였다.
도구카와 이에야스는 리프더호의 선원 얀 요스턴,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를 에도로 소환했다
이들에게 유럽의 사정을 듣고 외교 및 무역 분야 고문으로 임명하였고, 1609년 네델란드 동인도회사, 1613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일본을 방문하여 이라도 섬에 상관을 설치하여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무역이 개시된다.
윌리엄 애덤스는 일본에 정착하여 도쿠가와의 참모가 되어 일본이름인 미우라 안진으로 개명한다.
미우라 안진 은 쇼군을 자유롭게 알현 할 수 있는 상급무사 (하타모토) 까지 진급한다.
이사람이 서양식 선박제조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일본은 1600년에 개항
이무렵 일본은 은을 대량 채굴하여 멕시코에 이어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국제무역을 개시 하였는데. 당시 전 세계에세 첨단 하이테크 제품을 만드는 나라는 중국이었다.
일본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상인, 류큐왕국(오키나와)의 국제 무역상, 무장상인 집단인 왜구를 통해 명나라로 부터 비단과 도자기, 서적을 대량으로 수입했다.
일본은 하라도 상관을 중심으로 서구 각국의 문물을 수입하고, 일본산 도자기 칠기등을 수출한다.
네델란드를 통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받아들여 도쿠가와는 '서양 오랑캐에게도 배워야 한다' 면서 네델란드에서 유입된 서양 학문인 난가쿠{난학)를 일으켜 일본은 사실상 1600년에 개항을 한셈이다.
우리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한 개방을 겨우 시작함 고로 일본과는 약 300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적 팩트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
후안 바티스타호 항로
대평양을 건너 유럽으로
에도 막부는 허가 받은 공식 무역선(주인선.朱印船)을 해외에 파견하였고, 주인선은 중국, 베트남, 태국,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여 국제무역을 하였다. 이무렵 베트남과 태국, 필리핀에 '니혼마치' 라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 형성될 정도로 일본인들의 해외진출이 활발 하였다.
일본은 스페인 식민지 멕시코와 무역 위해 1613년 9월15일 센다이번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180명의 게이초(慶長) 유럽파견 사절단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건조한 길이 32미터, 너비 10미터의 범선 산 후안 바티스타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 스페인,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 하였다. 사절단은 7년 후인 1620년 8월24일 귀국했다.
일본은 이미 이무렵 세계로 활짝 열렸다 라는 사실을 이런 사절단 파견으로 알 수 있다.
인공섬 데지마
나가사키에 데지마 문 열어
나가사키를 개항에 용의 하게 만들기 위해 1634년 막부 나가사키 앞바다에 부채꼴 모양의 인공성 데지마(出島) 조성, 막부 허가 받은 서양상인에게 교역허가했다.
1635년 주인선 무역폐지, 1639년 천주교 포교활동을 하던 포르투갈 신부와 상인을 마카오로 추방, 그 이유는 천주교 신자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저항하는는 세력과 결합하여 반정부 세력화 되자 막부가 이를 탄압한다.
막부는 1641년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 상관(商館)을 히라도에서 데지마로 옮긴 이후 데지마는 난카구의 성지로 기능한다.
네델란드 무역선을 통해 카메라, 환등기, 선글라스, 메가폰, 온도계, 기압계등 서양의 물건을 수입 하였고, 단절된 포르투갈과의 무역은 부산 왜관을 통해 조선과의 무역 확대로 보충한다.
중국. 일본의 권력교체 - 누르하치의 등장
임진왜란(1592년). 병자호란(1636년) 와중에 동아시아에서 급격한 권력교체가 일어난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종식되고 도쿠가와 막부체제 출범, 중국은 명청 교체기라는 격렬한 권력교체가 시작된것이다.
혼란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열적으로 해외교역에 나서 해외무역은 막부 독점 체제로 진행되었는데, 막부는 무역활동과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정보를 독점하여 지방 영주들을 압도 하였다.
이무렵 일본이 국교를 맺고 있던 나라(통신)는 조선과 류큐(오키나와) 두나라, 국교는 맺지 않았으나 교역을 하고 있는 나라(통상)는 중국과 네델란드였다.
쇄국 하면서도 난가쿠 꽃피워
일본은 쇄국정책을 추진 하면서도 데지마를 통해 네델란드. 중국과 교역, 사쓰마 번과 류큐와 무역. 쓰시마 번을 통한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외부로 뚫린 바람구멍' 통해 '철통 같은 쇄국' 아닌 '느슨한 형태의 쇄국'을 추진.했는데, 반면 조선은 철통같은 쇄국정책을 취했다.
막부는 나가사키 통해 서양 과학기술과 문물을 정열적으로 받아들여 '난가쿠' 를 꽃피우고 개혁 개방에 앞장섰다.
1741년 기독교 관련서적을 제외한 서양서적 수입허용, 1745년 네델란드어 교습허용. 전국곳곳에 개설된 난가쿠 학교(蘭學校)에서 공부한 학생 3000명 넘었다.
난가쿠는 서양의학을의 발전을 이끌었고, 서양 과학과 기술을 통해 근대적 과학정신과 실증적 방법론을 전해주어 일본을 근대화 하기 시작했다.
중.일은 지식혁명 조선은 양반이 지식독점
막부의 수도 에도는 18세기에 인구 100만명을 돌파, 베이징보다 먼저 인구 100만 넘게된다.
일본은 17세기 말부터 출판의 대중화 폭발적으로 늘어서, 1700년대 초 에도(현재의 도쿄)에 서점 660곳, 이동도서관, 출판업자 6000명이 도서를 발간하고 유통했다. 이 서점을 통해 서양에서 유입된 난가쿠 서적이 대대적으로 보급 되면서 지식 혁명이 일어났다.
조선에서 서점 설치가 허락된 것은 1551년. 하지만 서점 활성화에 실패했다. 조선에서는 지식이 곧 권력. 지식은 지배층이 독점해야 하는 금단의 성역이었기 때문이다. 서점이 활성화 되면 백성들과 지식을 나눠가지는 것이 된다. 이것은 성리학적 사회적 질서의 훼손이다. 고로 지식은 지배층이 독점해야만 하는 금단의 성역으로 만들었다.
서점이 활성화 되어 일본처럼 지식혁명이 일어나 백성들과 지식을 나누게 될 경우, 조선의 사대부 양반지배계층 즉 성리학자들은 기존에 구축된 지식독점을 통한 권력독점 가능한 시스템에 위협을 받게된다. 고로 지식 즉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은 소수의 양반층들에게만 대대로 세습이 되어 강력한 권력의 세습구조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대다수 97%에 달하는 백성들은 무지의 세계, 글 한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의 상태로 방치 되었다.
출판혁명
1719년 제9차 조선통신사 홍치중 따라 제술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 이란 사람은 "오사카에는 서적의 많음이 실로 천하장관" 이라고 기록 하였다.
에도에서는 중국 난징에서 수입한 책이 1,000여 종. 민간에서 특이한 책과 각종 문집을 간행한 것이 조선의 100배가 넘었다.
서점 폭발은 중국도 비슷했는데. 베이징 '문화의 거리' 류리창(琉璃廠)은 조선 사신들이 서적 구입을 위해 자주 찾는 명소였다. 북학자 홍대용(후일 개화의 선봉역할을 함) 은 류리창에 서점 일곱 군데가 있는데, 각 서점마다 3면의 벽에 수십층의 책꽂이에 수만 권의 책이 꽃혀 있다고 소개했다.
홍대용은 "고개를 들고 한참 있으면 책 이름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먼저 핑 돌아 침침해진다" 고 소개 하였다.
나베시마와 난가쿠료
난가쿠에 미친 나베시마 나오마사 (鍋島直正)
일본 막부는 개혁 개방을 위해 발버둥
지방의 유력 번들도 부국강병을 위해 생존경쟁
일본 개혁의 대표적 인물로 사가 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
나베시마는 의식이 세계로 열려있던 인물이었다. 외국 문물을 받아 들이고, 일본을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고도칸(弘道館)이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사가 번 청년들에게 서양 최신 과학기술 교육했다.
고토칸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나베시마 1851년 번립 난가쿠 교육기관인 난가쿠료를 개교하여 고도칸을 졸업한 이들에게 지도자 교육을 시켰다.
천연두 예방주사를 수입하여 가장 먼저 자기 장남에게 시술. 이것이 일본 근대 종두법의 효시가 되었다.
나베시마 나오마사 동상
증기기관, 화약 연구개발
화술방(火術方) 무기연구소, 정련방(精鍊方) 이화학연구소 설치하여 서양식 무기와 증기기관, 화약, 전신기 등 연구개발하였고, 최신형 영국제 대포를 수입하여 전투력 향상, 각종 서양무기를 수입하여 분해한 다음 이를 모방하여 일제 국산 무기 제작.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국산 무기 개발했다.
니베시마는 본인의 사가번에서 제철과 무기 제작에 필요한 금속 장인을 확보하기 위해 황족 화족 사족 평민 등의 신분제를 완전히 철폐 하였고,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와 각종 교육기관에서 신학문을 익힌 후 산업분야에 투입 하였다.
도자기 기술로 제철소 건설
1852년 나베시마는 무기 제작에 필요한 철강 생산을 위해 반사로(爐)라는 근대식 용광로 제작했다. 이를 위해 도가지 가마의 내열기술과 근대식 고로 기술을 총동원하여, 도자기 굽는 가마 기술을 응용하여 제철소 건설에 성공했다.
이 반사로에서 생산된 강철로 근대식 대포를 제작하여 나가사키 수비대에 배치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구로후네, 서양식 철선)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직후 나베시마는 네델란드에 군함을 주문
이 배가 네델란드에서 건조되는 사이, 나베시마는 정련방에서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증기엔진을 만들고, 그 엔진을 장착한 일본제 증기선의 국산화 개발에 운행했다. 이런 사람이 일본에는 많았다
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마즈 나리아키라 근대식 공업단지 건설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는, 작은 "사가 번도 했으니 우리도 할 수 있다. 제철을 연구하라" 명령
사가 번의 화술방.정련방 벤치마킹 하여 자기 사저 뜰에 슈세이칸(集成館) 이란 근대식 산업시설 설치했다.
대포 주조, 탄약을 만드는 공장, 조선소와 유리공장, 방직공장 등 근대적 공업단지 건설했는데, 이곳에 근무하는 종업원 1200명이나 되었다.
사쓰마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인물이라면 신분 무시하고 파격적으로 발탁하여, 하급 무사 계급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발굴 한 것은 시마즈의 용인술 덕분이었는데, 이 두명의 인물은 일본 메이지 유신을 이끄는 거두 역할을 하게 된다.
일본 도자기
도자기 수출로 번 돈으로 근대화 추진
일본 막부가 미국과 수호조약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한 1854년,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근대식 대포 16문 탑재된 370톤짜리 군함을 건조하여 막부에 헌납했다.
1868년 메이지 시대 개막될 무렵 나베시마 나오마사, 시마즈 나리아키라 같은 개명한 리더들의 노력 덕분에 일본의 군사력은 서양 열강 세력의 중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발전했다.
나베시만 나오마사, 시마즈 나리아키는 수많은 기계와 기술을 서양에서 수입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 투입했다.
사가 번과 사쓰마 번의 수입원은 조선에서 임진왜란때 포로로 잡아간 도공들의 도자기 수출로 자금을 마련한다.
일본이 유럽에 수출한 사쓰마야키 아리타야키 이것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임진왜란때 포로로 잡아간 도공들이 나타난다.
아리타야키의 원조는 이삼평이라는 조선도공이고, 사쓰마야키의 원조는 심수관이라는 조선도공 이었다. 이렇게 도자기를 네델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서 수출해서 번 돈으로 서양으로 부터 수많은 과학기술 무기 기계을 수입해서 일본은 1600년경 부터 근대화를 시작한것이다.
도자기 대금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200억 엔(약 2,080억원), 이렇게 도자기 수출로 번 돈으로 서양에서 무기와 기계 수입하여 군사력을 강화 하였다.
조선도공 이삼평 기념비
조선과 일본의 차이
아리타 역사서에도 ' 이 대표도 군함도 아리타 도자기가 가져다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기록 되어있다.
아리타야키의 고향인 아리타산 정상에는 도조(陶祖) 이삼평 기념비가 있다.
비석 앞면에는 "일본의 보물을 만든다", 뒷면에는 이삼평을 도자기로 번 돈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열어준 '대은인(大恩人)' 으로 칭송하는 문구를 새겼다.
비슷한 시기, 조선 도동들은 양반들의 애완용 도자기 만드는 수준에 머물러, 1795년 8월6일, 도자기 굽는 분원에서 국왕 정조에게 "기묘하게 기교 부려 제작한 것들이 있다" 보고 하였으나, 보고를 접한 정조는 "쓸데없고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일체 만들지 못하도록 엄금하라" 어명을 내려 이로써 조선의 도자기 산업은 도리어 초토화 되었다.
위안부 소녀상
우리는 개항이 일본보다 30년 정도 뒤늦은것이 아니고, 무려 300년 정도 개항과 근대화가 뒤졌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과 한국의 국력의 차이, 문화의 차이, 문명의 차이, 국민들의 정신세계의 차이를 만들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는 일본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세우고 일본을 규탄하고 모욕하면서, 삼국시대 일본에 문물을 전해준 우리가 더 우월하다는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 일본은 무엇을 하였나. 우리보다 300년 먼저 개항을 하고 개국을 해서 서양과 무역을 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 근대화를 시작했다. 반면 우리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15~16세기에 먼옛날에 머물러 있는것은 아닌가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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