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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정승과 태종
노비종부법 시행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들도 아버지를 따라 천민을 면하게 함)
황희의 아버지는 고려의 무신인 황군서였지만 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에겐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비리와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조선 초기의 번영을 이끌어낸 최고의 공신이었죠.
태종 14년(1414년) 6월 예조판서였던 황희는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했는데. 태종 또한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찬동하여. 이후 태종은 직접 윤음을 내려 종모법을 종부법으로 바꿨습니다. 즉, 아버지가 양인이면 그 자식들도 아버지를 따라 천민을 면하게끔 했던것입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년(1414년) 6월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
종부법 개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서 이후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세금을 내게 됨으로써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습니다. 황희와 태종 덕분에 초기의 조선은 짧은 전성기를 누렸죠.
그러나 태종 역시 한품서용제를 실시한 서얼차별자로서 서얼들에게 한을 품게 만들었고 재가금지법을 시행하여 수많은 조선여성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황희는 뇌물을 받은 부패한 관리였습니다
세종
노비종모법으로 회귀 (어머니가 천민이면 슬하의 자식들은 자동으로 모두 노비)
이를 다시 아들인 세종이 다시 원래대로 노비종모법으로 바꾸어 버렸고, 부민고소금지법 (조선시대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에 대해 고소를 금지하던 법제)과 함께 양반에게는 유토피아를, 백성들과 노비들에게 지옥을 각각 선물합니다. 즉, 아버지가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슬하의 자식들은 자동으로 모두 노비가 되고, 노비가 된자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심지어 아무 이유없이 죽임을 당하거나 양반에게 강간을 당해도 고소하지 못합니다.
또한 조선시대 노비의 가치는 집이나 토지, 소같은 모든 재산목록중에서도 가장 값이 나가는 재산목록 1호 였으므로 양반들의 부의 축적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국가는 세금을 거둘 주체들이 줄어들게 되므로 재정이 악화 됩니다. 그러므로 훗날 세종대왕은 대왕이자 성군으로 사초에 기록된거죠. 기득권 양반들의 입장에서 세종만큼 본인들의 부를 축적해주고, 고소도 안당하는 법을 확실히 마련해준 왕은 없었던겁니다.
이렇듯 조선은 오직 소수 집권층 양반만을 위해 명분론에 빠져있던 최악의 국가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죽하면 1592년 임진왜란 시절 왜병에 투항하여 관군과 싸운 노비들이 많았고, 왜군에 잡혀갔던 조선 도공들은 지긋지긋하고 천대받는 노비생활 보다는 기술자로 대접받는 일본의 생활을 택하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강제로 귀국선을 탄 도공들이 배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기 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조선의 도공들의 제품은 일본이 16세기 근대화 개항시에 일본이 서양국가들과 무역을 할때 일본도자기는 최대 수출품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세계가 알아주는 명품으로 국부를 창출하고 이는 곧 일본 근대화에 기여하게 됩니다.
건국초기 이승만대통령은 이러한 조선시대 부터 비롯된 유구한 종놈의 나라의 사슬을 끊고자
첫째 교육의 의무화를 헌법에 넣고 의무교육을 실시 했습니다.
둘째 1950년 4월 세계최초로 지주와 소작인과의 합의 과정을 거쳐서 3ha 미만의 토지개혁을 국회입법후 통과 시행 했습니다
이 위대한 두가지 개혁으로 이땅 이나라의 국민들은 말 뿐만이 아닌 실질적 노비의 신분을 벗어 날 수 있었고, 나와 우리가족도 잘 살 수있다는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비해방 정책이 마침내 1950년 6.25 남침 전쟁에서 미국과 더불어 북괴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공산소련을 물리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던것입니다.
즉, 김일성의 공산당 사탕발림인 악덕지주의 땅과 집을 빼앗아 골고루 나눠 주겠다는 꼬임이 최소 남한에서는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던것이죠. 도리어 본인의 집과 땅을 지키고자 맞서 싸우고 협조하지 않은겁니다.
이땅 이나라는 이렇듯 이승만대통령과 이름없이 죽어간 수 많은 선교사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종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 입니다. 턴라이트와 우리 대한민국의 보수는 이러한 종놈의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게끔 문재인의 민주를 가장한 국가 사회주의 노비화 독재에 맞서 싸워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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