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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6.25 참전국가 일본

emfworld 2021. 2. 11. 21:17

인천상륙작전당시 맥아더원수와 참모진

미국에게 낯선 전장이었던 한국전쟁에서 큰 도움 주었던게 구일본군이었습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군사기밀을 미군에게 제공하고, 당시 한국과 중국 전체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다 있었는데, 인구, 기후, 군배치에 관한 세세한 기록을 제공하고, 항공촬영으로 제작된 지도 위에 특수공작원들의 정보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을 36년간 통치를 했으니 당연히 한국에 대한 모든 자료가 넘쳤겠죠)

일본덕에 이런 지도들이 미군에 의해 한국전에서도 활용되고, 실제로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국이 일본장교를 심문한 문서를 보면, 일본군이 김일성과 그의 군대와 어떻게 전투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 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한국전쟁에 있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본제국주의 유산인 구일본군의 정보는 한국전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 되었는데, 맥아더의 최대 치적인 인천상륙작전.

미국을 비롯 유엔군 5만명이 동원된 인천상륙작전은 사실 한국전쟁중 가장 위험부담이 큰 작전이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5m가 넘는 인천은 썰물때는 상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갯벌에 병사들이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죠.

당시 맥아더사령부 정부장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데는 사전탐지를 해야겠다고 해서 3명의 구일본 대위, 해군중위, 육군대위를 미 육군 군속으로 가장시켜서 같이 데려갔습니다.

미군을 가장한 일본군. 그들은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 정보들을 제공하였습니다. 어뢰탐지, 조작 그리고 수심, 조수간만 시간, 어느 경로로 들어가야할지 등등

육군대위는 나카노 특수공작관으로 조선군 사령부정보관으로 오래있어서 한국 서해안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 수 밖에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의 조사내용을 참고로 결정된 9월15일 오후5시 30년만에 인천항의 수위가 가장 높을 때 였습니다.

결과적으로 UN군이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작전이자 대한민국역사를 바꾼 이 사건은 일본이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문서를 보면

인천상륙잔전 상륙해안 작전도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7만명을 상륙시키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때, 전차상륙함(LST)의 6할(60%)은 일본인이 운행했습니다.

로버트 와이손(93세: 당시 미국 해병대원)의 증언

“일본인은 조선반도를 다녀봐서 해안지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협력하여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

무라야마 후미하루(村山文治:92세): 당시 LST대원

인천상륙작전에는 2000명에 이르는 일본인이 대원으로 참가했다.

GHQ(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일본상선관리국에 소속되었던 LST Q086대원은 고베에서 인천으로 갔다.

★ LST Q042 선원 나카무라 카쿠이치는 임무중 사망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일본인 57명이 전쟁 수행중에 사망했다.

그 이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진격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선이 북상함에 따라 가장 큰 문제는 유엔군 전부대에 대한 원할한 보급이었다.

집중포화로 초토화 된 북한 지역은 대부분의 도로가 끊어져서 육로로 보급이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원활한 보급을 하기엔 부산항은 너무 멀었죠.

보급선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동부전선에 새로운 상륙항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했고 그렇게 원산상륙작전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다의 복병 기뢰였습니다. 상륙을 막는 기뢰가 원산 앞바다에 부설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군함뿐만아니라 미국 함대도 접근했다간 터져버리죠

이 기뢰가 있는 한 아무리 거대한 미군의 함대라도 전혀 힘을 발휘못합니다. 그렇기에 기뢰를 제거해서 바다를 안전하게 하는것이야말로 원산상륙 작전이 성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습니다.

10월4일 극동권 해군사령관은 서둘러 일본정부에 소해정 참전에 관한 협조를 요청하는데, 20척의 소해정과 함께 태평양참전, 당시 최고의 기뢰제거능력을 가진 모 일본소해대를 한국전쟁에 보내달란것이었습니다.

당시 원산 앞바다에는 무려 3천개 이상의 기뢰가 집중 부설되어 있었습니다. 기뢰는 육지의 지뢰 같은 것으로 바다에 떠다니다가 물체에 부딪히면 폭발 하는데, 일본 소해대는 이 기뢰를 그물로 건져 올려서 처리 했습니다.

당시 민간인들의 참전과는 달리 이들은 신분이 공무원이었다는 것이고, 일부는 국가 의지로서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결국 일본 소해대 기뢰작업 덕에 미군은 원산상륙에 성공하였고, 원산뿐이 아니라 이후 미군의 상륙이 있을때 마다 일본 특별 소해대가 먼저 출동해서 기뢰를 제거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53척,1250여명의 소해대원이 참전하였다고 합니다.

그외

- 일본인 미군 노무자들, 대전 전투에서 소총 들고 싸우다 다수 사망

- 일본인 기관사들 경부선 등에서 열차로 미군 수송

- 규슈 등지의 야전병원에서 일본인 종군 간호사 치료 활동

- 일본인들의 혈액이 전투 중 부상당한 미국,한국군인들에게 수혈됨

- 민단에 의용병으로 참전을 신청한 일본인들도 다수

 

당시의 일본은 미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정식 참전국가로 인정을 못 받았지만, 한국전쟁에서 피 흘려 싸웠고, 많은 물자지원을 했음이 FACT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본이 한국전쟁 덕분에 경제가 성장하고 본인들 이득을 위한 것 이었다며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어떤 나라가 자국에 아무런 국익이 없는데 손해 봐 가면서 남의 나라 전쟁을 도와주겠습니까? 이는 6.25전쟁에 참전한 모든 국가에게 해당 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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