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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구 수성못 이야기

emfworld 2021. 2. 10. 20:01

아름다운 수성못은 대구관광의 필수코스, 수많은 관광객과 시민들의 휴식처 입니다.

수많은 대구시민들의 낭만과 추억이 서린곳. 수성못

이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은 다름아닌 일본인 입니다.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진정으로 한국의 농민들을 생각해 관개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선한 일본인의 업적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야 한다"

수성못 축조한 일본인 고(故) 미즈사키 린타로 70주기 추도식 거행

대구의 명물 수성못. 옛 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고, 지금 사람들에게는 레포츠와 유흥으로 또 다른 의미를 선사하는 곳이다. 수성못 맞은 편 야트막한 산 입구에는 대구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소가 숨어 있다. 한 일본인의 묘다. 옛날에는 수성못을 굽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건물 일부에 막혀 수성못 전체가 보이지는 않는다. 묘의 주인공은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水崎 林太郞). 바로 수성못을 축조한 인물이다. 수성못과 그의 묘는 '한일 우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1914년 그는 가뭄과 홍수로 인해 황폐한 수성들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사재(私財)와 총독부의 지원으로 받은 당시 돈 1만2000엔(현재 10억엔상당)을 수성못 축조공사에 털어 넣었다.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10여년의 공사 끝에 현대적 관개 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축조해 대구의 농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공사 때 못 축조를 반대한 사람이 던진 돌에 다리를 맞아 곤경에 처했던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 수성못은 관개시설로서의 기능은 다했지만 지금까지도 대구사람들에게는 추억과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대구 수성못 건너편 야산에 자리한 일본인 미즈사키 린타로씨의 묘에서

열린 70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고인의 공로를 기리고 있다.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1939년 세상을 떠났다. 생전 그의 유언에 따라 수성못이 내려다 보이는 현재의 장소에 안장됐다. 그의 묘는 농민들의 보살핌을 받아 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묘지가 유실되고 묘비만 남게 됐다. 잊혀져 버려지다시피 한 것.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서창교(徐彰敎·78) 한일친선교류회 회장이 그의 묘소를 찾아 보수에 나섰다. 또 현창비도 건립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후 한일친선교류회가 미즈사키씨의 묘지를 관리하고 매년 그의 기일(忌日)에 맞춰 추도식도 거행하기 시작했다. 이 추도식은 일본에까지 알려져 많지는 않지만 일본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올해는 미즈사키 린타로씨가 세상을 뜬 지 70년을 맞는 해다.

한일친선교류회에서는 그의 기일인 4월 13일 묘지에서 70주기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날 행사에는 일본측에서 다미스치 슈이츠 부산주재 총영사, 사가야마 유시 고 미즈사키 린타로 현창회장 등 일본인 25명을 비롯 한일친선교류회 회원, 한일다문화연구회 회원 등 60여명이 참석해 미즈사키 린타로씨의 공을 기렸다. 한일친선교류회측은 앞으로 인근 수성관광호텔에서 묘지에 이르는 직선 코스 조성, 묘지 주변에 심어져 있는 이태리 포플러 대신 벚꽃을 심는 등 묘지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주력할 계획이다.

서창교 한일친선교류회 회장은 "미즈사키 린타로씨는 진정으로 한국의 농민들을 생각해 관개시설을 갖춘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었다"며 "우리는 선한 일본인의 업적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회장은 자신과 부인이 죽으면 화장해 유골을 미즈사키씨의 묘지 부근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 상태다. 이 같은 사람은 몇명이 더 있다고 했다.

출처 : [대구·경북] "수성못 덕분에 홍수·가뭄 극복했지요"

정말 고마운 분이죠. 수성못 주변 농민들의 물부족 가뭄문제를 해결하고 평생 수성못을 지키다. 일본 고향으로 가지않고 자신의 무덤마저 수성못 내려다 보이는곳에 묻어달라는 진정 대구와 수성못을 사랑한 고마운분

그런데 ..▼이사람이 [기고] '미즈사키 린타로' 추모제 없애야 (라는 기고문을 대구매일신문에 올립니다)

멀쩡하게 생긴게...

대구 수성못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못의 남쪽, 식당 뒤쪽에 한 일본인의 묘가 있다. 그의 이름은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 여러 곳의 안내표식과 묘의 안내판에 따르면 이 사람이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수성면으로 와 화훼농장을 운영했다. 신천의 물이 대구부의 식수로 이용되면서, 수성들의 농업용수가 부족해지자 조선인 4명과 수리조합을 만들고 수성못 축조에 앞장섰다. 자신이 죽으면 장례는 조선식으로 하고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사실과 다른 것이 너무 많다. (뭘까? 두근두근)

미즈사키가 추앙된 근거는 2개의 신문, 1927년의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기사다. 알다시피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사시가 내선일체였고,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에 협조한 신문이다. 동아일보는 그 당시에는 친일이 아닌 실제 조선인을 위한 보도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보도한 신문들이 친일신문이라서? 당시 친일 안한 신문 있나? 뭐지??)

미즈사키는 일본 기후현의 면장'읍장급 공무원이었다. 1915년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해서, 가산을 탕진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인연이 있던 수성면으로 온 '개척농민'이었다. 개척농민이란 일제가 조선을 내선일체화하기 위해 조선으로의 이주를 권한 일본인 농민을 말한다. 즉 조선을 뿌리까지 식민지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첨병 역할과 그 하부 조직으로 끌어들인 일본 농민 (뇌피셜 오지네요, 초장부터 소설질이냐) 이다.

미즈사키는 수성면의 대부호인 '서수인'의 도움을 받고, 화훼농장을 운영하며 6년 만에 2만㎡(6천 평)의 농장 경영인으로 성장한다. 당시 대구부에 일본인이 많이 이주해 와 10만 명에 이르렀고, 신천 물을 대구부의 식수로 이용하기 위해 상수도를 내자 수성 들녘에 농업용수가 부족해졌다. 이렇게 되자 미즈사키는 조선인 4명과 수성수리조합을 창립하고, 조합장은 진희채에게 맡긴 후 자신은 부조합장을 맡는다. 진희채는 중추원 참의와 도평의원을 지낸 부호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인 친일 귀족이다. 조합원은 436명인데, 조선인 414명, 일본인 21명, 프랑스인 1명이었다. 여기서 조선인이 대부분이란 사실 때문에 다른 식량 수탈을 위한 수리조합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조합장이 친일귀족이란거와 수성못 축조가 뭔 상관이죠? 대다수 조합원이 조선인이라 혜택이 거의 조선인에게 간건 말 안함)

사업비는 16만7천원인데,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6만2천500원을 차입하고, 총독부 1만1천원, 도청지방비 2만원, 대구부청에서 4만원을 보조받았다. 나머지 3만3천500원은 조합원이 부담했다. 1927년 완공 후 물세는 990㎡(300평)에 연간 2원60전을 균일하게 징수한다. 그 수입이 매년 9천600원이었다고 하니, 총공사비를 17년 만에 다 갚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익사업(그 혜택 조선인들이 다 받음) 이었다. 물세를 받은 사실(고작 이거 하나로??) 이 있는데도 조선인에게 마치 엄청난 혜택을 베풀었다는 것은 오류다. 미즈사키 자신은 1년에 물세를 8전밖에 물지 않았다고 하니(이분 전재산 수성못 축조에 들어간건 절대 말 안함), 6천 평의 지주인 점을 감안하면, 스스로 대단한 혜택을 받았다. 수성수리조합은 조합원의 분쟁(반대운동)이 없었으므로 미즈사키의 치적이 인정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부자가 한두 번 적선했다 하더라도 높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일제강점기에 설령 일본인의 선행 사실이 나타났다 하더라도 (사람입니까? 배은망덕이 하늘을 찌르네요) 검증에 검증을 거쳐야 한다.

수성못 곳곳에 자리 잡은 안내표시판은 대대적으로 수정과 삭제를 해야 한다. 미즈사키 묘의 안내판은 없애고 싶지만 이 또한 역사라고 한다면, 문구를 '축조의 혜택이 소수의 친일 지주에게 돌아갔다'(근거없음 오히려 대다수 조합원이 조선사람들이 혜택받고 농업생산력 증가함'식량 수탈의 목적도(순전히 뇌피셜) 있었다'고 병기해 놓아야 한다. 매년 열리는 미즈사키 추모제는 없애야 한다. 이는 미즈사키의 묘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목 놓아 부른 이상화 시인을 기린 상화동산 면전에 있다 (이사람 묘소는 상화동산 만들기 80여년 전에 이미 거기 있었음. 전혀 상관 없는거 다 끌어들임) 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강민구 대구 수성구 의원

난또 뭐 대단한 내가 모르는 뭔가 있나 깜짝 놀라서 읽어봤더니 역시 순전히 뇌피셜에 억지주장, 오히려 린타로씨의 고마움만 더 부각시켜줍니다. 그래서 이따위 배은망덕의 끝판왕 기고문 올리는 사람이 대체 평소 뭐하던 물건인지 한번 살펴 봅니다

네~ ㅋㅋㅋㅋㅋㅋㅋ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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